자신의 일이든 조직의 일이든 성과를 내고 몰입해서 일할수 있으려면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비운 곳에 비로소 자신의 가치와 비전을 심고 그것을 위해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지나간 과거에 얽매여 새로운 미래를 위해 과거를 포기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 합니다.
이미 지나간 것은 놓아버리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나은 것을 꿈꾸면 되는 일인데 말입니다.
아래는 그에 대한 내용을 '꿈꾸는 리더의 마음챙김'에서 인용해 보았습니다.
조직의 리더로서 다양한 이해관계에 부대끼며 살아가다 보면 오히려 나 자신을 위한 삶은 사라지고 조직을 위해 행해야 할 역할들만이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연속되고 나 자신의 삶에 대한 감수성과 열의가 줄어들 때, 보다 큰 틀에서 나의 삶의 가치와 비전에 대해 다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머리와 가슴속에 조직의 일만이 존재하고 나 자신의 감성과 비전을 넣을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는 커다란 불행입니다. 집안에 물건을 쌓아놓기만 하고 버리지 않아서 내가 쉴만한 공간조차 사라져 버린 집은 더 이상 쓸모가 없듯이 해야 할 역할만 존재하고, 나 자신만의 소중한 비전을 위한 공간을 가슴속에 따로 마련해놓지 않는다면 그 리더의 삶은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막을 내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소중한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 친구를 초대하고 소개시켜줄 수는 있을지언정 거기에 머무르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서른 개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을 이루는데
그 비어있음 때문에
수레의 쓸모가 있게 된다.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인해
그릇의 쓸모가 있게 된다.
문과 창문을 뚫어 방이 만들어지는데
빈 공간이 있기에 방의 쓸모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쓸모에서 나온다.
- 출처: 도덕경 11장, 저자 해석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고, 모든 세상을 아우르는 가장 큰 그릇도 나 자신의 마음입니다. 리더는 스스로 가치와 비전을 새롭게 가다듬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세부 업무들을 재조정함으로써 자신의 뚜렷한 비전을 중심으로 모든 일의 흐름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 합니다. 가치와 비전이라는 명확한 등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의 우선순위도 보이지 않을 것이고 동기부여도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가치와 비전이 명확하면 비로소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힘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일의 절반이고,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나는 온갖 갈등과 이해충돌을 조정하는 것이 리더에게 남은 나머지 일입니다. 앞의 일은 가치와 비전으로 표현되며, 나머지 일은 마음챙김으로 표현됩니다. 내가 속한 직장, 가정, 나 자신의 삶조차도 이러한 과정의 반복입니다. 따라서 뛰어난 리더는 자신의 가정과 자신 개인의 삶도 안정적이고 조화롭게 이끌어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끌어야 할 것이 많아질수록 삶은 번잡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깊이 마음챙김하는 수행자는 오히려 조직도 가정도 버리는 외로운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 글을 읽은 독자분들이 모두 조직과 가정, 나 자신의 비전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 꿈꾸는 리더의 마음챙김 중, 박지온 저
비움은 비움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채움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의미있음을 한번 더 강조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일론 머스크는 기술과 비즈니스 혁신을 통해 엄청난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인물입니다. 기존에 이처럼 과학과 비즈니스 두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혁신을 이룬 인물로 에디슨과 테슬라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와 달리 지금은 프로그래밍과 인터넷이라는 혁신적인 기술 덕분에 한 사람이 혼자서 더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기술적 혁신을 바탕으로 기존 인물들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성과와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인터넷 결제, 우주항공 산업, 전기자동차, 신재생에너지, 인공지능, 생체인식 등 각 미래를 이끌어갈 첨단 핵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어떻게 이처럼 대단한 업적들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요? 일론 머스크는 어릴 때 매우 극단적인 아버지한테서 영향을 받고 자라났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학창시절 학교 폭력으로 인해 코뼈가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어릴 적부터 자폐증의 일종인 야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문제들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 국가의 대통령보다도 더 큰 국제적 영향력을 지닌 인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가 이처럼 대단한 인물로 성장하게 된 이유에 대해 유튜브에 소개된 한 영상을 바탕으로 내용을 다음과 같이 풀어보았습니다. 일론머스크의 사고법은 현대의 개개인들이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참고해야할 많은 중요한 부분들을 담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선명하게 시각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시각화된 미래 비전은 매우 정교하고 섬세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래는 일론 머스크가 작성한 화성을 인간이 살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미래 계획표입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화성을 인간들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탈바꿈할건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과 계획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정교한 시각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선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예측을 자주 시도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일의 최종적인 비전과 목표를 설명하는 과정도 도움이 됩니다.
b. 단계별 목표 설정
큰 목표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단계를 세분화해서 한 단계씩 나아가야 합니다. 수치적인 목표는 비전에 가까워지는 과정일 뿐임을 알고 현재의 단계에 안주하지 않을 때, 동기부여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페이팔을 매각했을 당시 이미 수천억 자산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비전을 위한 하나의 단계로 인식했기 때문에 테슬라, 스페이스X와 같은 엄청난 회사들을 창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초기 제품 생산에 많은 난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Tesla의 Roadster, SpaceX의 Falcon1 로켓 등의 초기 제품을 내놓았습니다. 또한 초기 제품의 성공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제품을 개발했습니다. 즉 Tesla의 Model S, 3, X, Y, SpaceX의 Falcon 9, Starship 등으로 제품 라인을 지속적으로 확장했습니다. 또한 웹상에 공개되어 있는 일론 머스크의 회사별 관계도를 확인해보면 각각의 회사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는 해외 원문 자료를 한글로 직접 번역한 자료입니다.
그는 핵심이 되는 한 가지에 극도로 몰입하고 나머지 것들에 의식이 분산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중요한 것에 집중하여 경쟁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수준으로 성과를 냈습니다. 즉 전기차 배터리의 경우 셀디자인 변경, 제조 공정효율화, 원료의 효율화, 차량구조의 변경 등을 통해 원하는 목표로 다가갔으며, 스페이스X의 경우 위성 자세제어, 수직 이착륙 등의 기술개발을 통해 우주선의 1단 발사체를 재활용할 수 있도록 개발 비용을 절감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5.1 몰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질문을 던지고 문제의 원인을 규명해야 합니다. 일론머스크나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은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데 집중하였습니다. 질문 자체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일론 머스크는 자신의 비전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들을 정의했습니다. 예를 들어, 스타링크를 탄생시킨 질문은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고속인터넷은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였고 스페이스X의 획기적인 비용절감은 ‘어떻게 하면 한번 발사하면 버려지는 발사구조체를 재활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러한 명확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만의 세밀한 비전을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비전을 성취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질문을 통해 문제를 명확히 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문제가 해결된 상태인 명확한 비전을 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5.5 본질을 파고드는 통찰력’에서 이미 다루었던 내용입니다. 이는 물리학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근본적인 원인 혹은 더 이상 나눠지지 않는 본질까지 분해하여 그 분해된 본질을 바탕으로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즉 일론 머스크는 문제를 발견했을 때 문제의 원인을 살피는 ‘왜?’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았으며, 그 원인을 살피는 과정에서 제1원칙 사고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전기차 시장이 태동하기 위한 주요한 문제였던 배터리의 비용 절감, 우주발사 시스템의 고비용에 대한 대안으로 로켓의 재활용 등을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대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학문을 융합하여 응용하는 한편 뛰어난 인재들을 영입하였습니다. 제1원칙 사고법은 본질적인 사고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여러 다양한 사업들 간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도 사업간 시너지와 성장을 이끌어 냈습니다. 예를 들어, 테슬라의 전기차 기술과 솔라시티의 태양 에너지 기술을 결합해 가정용 에너지 솔루션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교통 문제 해결을 위해 하이퍼루프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보링컴퍼니를 설립해 지하 터널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과 같은 사업의 확장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일론 머스크는 '비전의 시각화', '단계별 목표 설정', '집중과 몰입', '올바른 질문 던지기', '제1원칙 사고법' 등의 솔루션을 통해 자신의 비전을 하나씩 현실화해 나갔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나의 욕심을 이루게 해달라고 저 세상의 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내 내면의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내 안의 하나님의 목소리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지 바깥의 말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남들의 말에 불과합니다.
내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하고, 남들의 말에, 저 세상의 신(우상)의 말에 꼬득여 나가면
그 때부터 괴로움이 시작되고, 지옥(내면의 갈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내면의 목소리는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모든 상황을 꿰뚫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깥 세상의 권위에 눌려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니 당연히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란 내 안에 존재하는 지혜로운 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내 안의 내면의 목소리가 아닌 외부에 존재한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내 안의 내면에는 지혜로운 자(선善)의 목소리, 어리석은 자(악不善)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 때 지혜로운 자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나와 주변에 사랑을 주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반면 어리석은 자는 남과 비교하고 분노하고 불만족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내안의 하나님을 발견한 나 자신 = 유일함 = 하나님 = 무한의 가치"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순간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 일도 없어지지만, 이와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하나님이 있음을 알기에 누구든 나처럼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선생님,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옳은 대답이다.그대로 실천하여라.그러면 살 수 있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의 복음서10장25~37절
강연의 세 번째 내용(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간증)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곧 하나님(내 안의 목소리)에 대한 간증이 오히려 우상(나 밖에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신)에 대한 간증으로 변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기대, 희망, 비전은 눈에 보이는 존재인가요?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으면 나에게는 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인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비전이 마음에 깊이 찍히면 그 밝은 빛으로 인해 세상의 온갖 티끌(나의 비전을 방해하는 요소들)에 대해서는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결국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비전을 가리게 하고, 물욕의 삶과 현실에 눈을 뜨라 하는 나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 그것이 곧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에 유혹 하는 자가 와서"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성서에'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하지 않았느냐?"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하지 않았소?"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하고 대답하셨다.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사탄아,물러가라!성서에'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하시지 않았느냐?"하고 대답하셨다.마침내 악마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
마태오의 복음서4장1절-11절,공동번역성서
"나는 천국을 보았다." 책소개 관련하여서는 kbs에서도 관련 내용을 방영하였습니다. 인류가 문명을 일군 이래로 가장 핵심 이슈는 사후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괴로움의 근원에는 삶의 유한성이라는 문제가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다면 사후 세계를 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천국과 지옥, 죽음 이후 세상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세상이 존재한다면 그 세상에서 육체없이 존재하는 영혼이 또한 존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후세계의 존재 유무는 이미 기독교 뿐만 아니라 불교나 무속신앙, 기타 종교에서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얘기입니다. 원시부족 시대부터 사후 세계를 위한 무덤, 제사 등이 있어왔으며, 오히려 원시시대에는 부족장보다 제사장의 지위가 더 높았음은 이미 역사책에 다 기록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어떤 종교이든 사후세계인 천국과 지옥의 존재 여부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사후세계는 곧 부정되는 것이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에 큰 의미를 두고 믿어온 종교인들에게는 삶 전체가 무너지고, 희망이 사라지는 충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현실의 걱정과 근심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종교적 믿음을 통해 사후세계에 대한 보상을 기대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는 지금 여기의 평안을 얻는 것이지, 지금 여기에서의 희생을 통해 저 세상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아래는 중세 로마가톨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 내용입니다. 이러한 종교의 상품화는 모든 종교를 막론하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다음 생을 걸지 않는 종교는 그 대중성, 상품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계에서는 이미 임사체험이란 과다한 호르몬 방출로 인해 일어나는 환상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사후 체험은 몸이 완전히 죽은 후 영혼이 나 자신의 몸을 유체이탈하여 세상을 경험하는 것인데 그 몸을 바라보는 영혼의 눈은 어디에 있을까요? 만약 그러한 눈이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몸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내용을 조금만 고민해본다면 사후 체험이라는 것이 사실은 임사체험이며 임사체험은 곧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두뇌의 착각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현재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요? 우리가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동일성을 가진 나가 있어야 성립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신분상으로는 주민등록증이라거나 지문, 유전자, 집주소, 폰번호, 가족관계 등 나를 특정지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나라고,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겉으로 드러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상 변하는 사회적 관계, 이 몸과 그리고 마음 가운데서 변치않는 나만의 그 무엇을 우리는 정체성이라고 하는거잖아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정체성을 특정할 수가 없습니다. 특정할 수 있는 사람 있나요? 남들에게 보이는 나가 아닌, 내가 나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특정할 수 있는 나를 찾을 수 있는지요? 왜냐하면 그 정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나는 지금은 없습니다. 미래의 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금 여기 현재의 나는 계속 과거로 사라져 갑니다. 시시각각 몸도 마음도 변하고, 사회적 관계는 더더욱이나 심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나를 있는그대로 바라봐줄 사람은 남이 아닌 나 뿐입니다. 굳이 변함없는 나를 세울 수 있다면 그것은 미래의 꿈(비전)으로서의 나일 것입니다. 미래의 꿈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는다면 나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치 저 북극성이 지금 나의 위치는 아니지만, 내가 가는 길의 나침반이 되어줄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전은 나에게 삶의 동기를 제공하고, 나의 과거와 미래, 현재를 잇는 정체성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가 아니라는 비전의 특성으로 인해 현재의 나와 미래의 비전은 항상 갭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삶의 에너지이자, 동기가 될 수 있는 반면 불만족이자, 나를 혹사시키는 원인이 될수도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먼 미래를 위해 열심히 달려가다가 어느 날 문득 미래 비전과 별개로 지금 여기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을 때 지금 여기의 나는 텅비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석가는 공 혹은 무아라 말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비전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세상일에서는 한가했고 그러했기에 현실의 허망함과 모순을 있는그대로 깨달을 수 있었지만, 아무리 뛰어난 인재들도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는 미래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절대로 지금 여기의 텅빔, 공허함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설사 문득 문득 들어서는 그 생각 역시 오히려 삶에 대한 안이함, 게으름으로 여기며 생각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이상을 추구하는 우리들 범부의 삶입니다. 어느날 문득 나라고 상정하던 자기만의 정체성이 깨어지는 현실을 마주하면 그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하고 단지 엄청난 괴로움과 자기모순에 부딪힐 뿐입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 속에서 변하지 않는 나를 찾아헤매는 것이 우리 삶의 가장 큰 착각입니다. 그것이 과거의 나이든, 미래의 나이든, 현재의 나이든 말입니다. 그나마 현실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미래의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사회적으로는 칭송받을지라도 지금 나의 불만족, 불안함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합니다. 이를 지혜로운 이들은 다람쥐 챗바퀴 도는 삶, 즉 윤회라고 말합니다. 다음 생, 저 세상이 있어서 윤회라고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람쥐가 챗바퀴도는 것을 어리석다고 알수는 있어도 자기 스스로의 챗바퀴같은 삶을 알아차리기는 참 힘든 것이지요.
그렇다면 미래에 의지하지 않고 텅빈 현실에 마주칠 때 다시 의지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처럼 사유하는 지혜입니다. 나 자신은 그 무엇도 아니지만, 과거의 나, 미래의 나, 지금의 나 모두를 하나하나 사유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텅 비어있음을 있는 그대로 앎에서 나오는 그 무엇에도 묶이지 않는 지혜의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