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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젼과 마음챙김

내 밖의 신은 없다. 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by 지혜 명상 2024. 7. 30.

저는 윤회와 사후세계를 믿지 않지만, 개인의 꿈, 희망, 비전은 삶에 절대적으로 작용한다고 믿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활이란

깊은 깨달음의 계기로 나 자신과 나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즉 성경의 표현을 나 자신의 비전에 대한 믿음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를 현실적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종교적으로 세뇌되거나, 영생에 대한 욕심에 매달리게 되면

결국  스스로에게 속아넘어가서 다음 생의 삶을 꿈꾸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사후의 삶에 대한 혹은 영생에 대한 욕망이 없다면 일단은 그러한 것이 진실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살피는데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할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 집에 황금송아지 있다고 외친들 그것을 보지 않는 한 누가 그것을 믿어주나요?

 

이는 사기꾼이 아무리 나를 꼬득여도 사실여부를 검증하는 태도만 가지고 있다면

그 사기에 걸려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나에게 다음 생에 대한 삶의 희망이 있기에 사후세계와 영혼의 존재에 대한 종교적 믿음을 놓아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기타 무속신앙 등 모든 종교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즉 세속적인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저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아래의 내용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live/qr4uvNKeB6w

 

 

강의가 시원시원합니다.

 

* 전한길 = 공무원시험 한국사 일타강사.

* 세계로 교회 = 부산에 위치한 고신(대한예수교장로회) 계열 교회

 

아래는 위 강연을 끝까지 듣고 개인적인 소감을 적은 내용입니다.

 

청춘이란 곧 '미래에 대한 기대, 희망, 비전'이며 그래서 청춘은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즉 나이가 들어도 비전을 잃지 않는다면 그는 청춘이지만,

아직 어리지만 아무런 비전이 없다면 그는 곧 늙음과 죽음 앞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나의 욕심을 이루게 해달라고 저 세상의 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내 내면의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내 안의 하나님의 목소리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지 바깥의 말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남들의 말에 불과합니다.

내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하고, 남들의 말에, 저 세상의 신(우상)의 말에 꼬득여 나가면

그 때부터 괴로움이 시작되고, 지옥(내면의 갈등)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내면의 목소리는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모든 상황을 꿰뚫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깥 세상의 권위에 눌려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니 당연히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란 내 안에 존재하는 지혜로운 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내 안의 내면의 목소리가 아닌 외부에 존재한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내 안의 내면에는 지혜로운 자(선善)의 목소리, 어리석은 자(악不善)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 때 지혜로운 자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나와 주변에 사랑을 주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반면 어리석은 자는 남과 비교하고 분노하고 불만족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내안의 하나님을 발견한 나 자신 = 유일함 = 하나님 = 무한의 가치"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순간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 일도 없어지지만, 이와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하나님이 있음을 알기에 누구든 나처럼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의 복음서 10 25~37


 

 

강연의 세 번째 내용(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간증)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곧 하나님(내 안의 목소리)에 대한 간증이 오히려 우상(나 밖에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신)에 대한 간증으로 변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기대, 희망, 비전은 눈에 보이는 존재인가요?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으면 나에게는 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인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비전이 마음에 깊이 찍히면 그 밝은 빛으로 인해 세상의 온갖 티끌(나의 비전을 방해하는 요소들)에 대해서는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결국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비전을 가리게 하고, 물욕의 삶과 현실에 눈을 뜨라 하는 나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 그것이 곧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에 유혹 하는 자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시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마침내 악마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


마태오의 복음서 4 1-11, 공동번역성서

 


 

"나는 천국을 보았다." 책소개 관련하여서는 kbs에서도 관련 내용을 방영하였습니다. 인류가 문명을 일군 이래로 가장 핵심 이슈는 사후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괴로움의 근원에는 삶의 유한성이라는 문제가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다면 사후 세계를 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천국과 지옥, 죽음 이후 세상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세상이 존재한다면 그 세상에서 육체없이 존재하는 영혼이 또한 존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0tV7SkD95s

 

 

따라서 사후세계의 존재 유무는 이미 기독교 뿐만 아니라 불교나 무속신앙, 기타 종교에서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얘기입니다. 원시부족 시대부터 사후 세계를 위한 무덤, 제사 등이 있어왔으며, 오히려 원시시대에는 부족장보다 제사장의 지위가 더 높았음은 이미 역사책에 다 기록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어떤 종교이든 사후세계인 천국과 지옥의 존재 여부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사후세계는 곧 부정되는 것이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에 큰 의미를 두고 믿어온 종교인들에게는 삶 전체가 무너지고, 희망이 사라지는 충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현실의 걱정과 근심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종교적 믿음을 통해 사후세계에 대한 보상을 기대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는 지금 여기의 평안을 얻는 것이지, 지금 여기에서의 희생을 통해 저 세상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아래는 중세 로마가톨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 내용입니다. 이러한 종교의 상품화는 모든 종교를 막론하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다음 생을 걸지 않는 종교는 그 대중성, 상품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https://pasteve.com/christianity-comparison/indulgence/

 

면죄부 - 면죄부는 중세시대 로마가톨릭의 획기적인 기획상품!!

면죄부 - 면죄부는 중세시대 로마가톨릭의 획기적인 기획상품!! │ 중세시대 가톨릭교인들은 돈이 많이 필요했을 듯싶다.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교회에서 발행하는 어

pasteve.com

 

 

 

그러나 과학계에서는 이미 임사체험이란 과다한 호르몬 방출로 인해 일어나는 환상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사후 체험은 몸이 완전히 죽은 후 영혼이 나 자신의 몸을 유체이탈하여 세상을 경험하는 것인데 그 몸을 바라보는 영혼의 눈은 어디에 있을까요? 만약 그러한 눈이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몸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내용을 조금만 고민해본다면 사후 체험이라는 것이 사실은 임사체험이며 임사체험은 곧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두뇌의 착각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9dE_ZsiMs8

 

 

저의 주장은 위 내용에서 보시다시피 사후세계를 믿는 기존 전통적 종교관과는 전혀 맥락을 달리합니다.

그렇다고 유물론자도 아닙니다. 비전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후세계가 존재하기를 믿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러한 세계가 없다면 어떡할건지에 대해 한번씩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먼 미래를 기약하지 말고, 당장 지금 여기에서 원하는 것을 이루어나가는 행복한 삶을 꿈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후세계(그것이 존재한다면)의 행복과 지금 여기의 행복을 비교해보는 것은

나 자신의 소중함을 알고 나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씩 생각해 봐야할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나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은 나 자신의 목소리이지,

신(그것이 존재한다면)이든 인간이든 외부의 목소리가 아님을 명심해야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