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WjT39n4LowU
https://www.youtube.com/watch?v=7snj87PMxeQ
너무나 경축할만한 일이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과 함께 작가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들을 유튜브로 들었습니다.
국가의 폭력을 인간관계의 폭력에 비유해서 써 놓은 책들이라 박근혜정부때 금서(블랙리스트)조치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소설의 일부 문구들을 들으면서 느낀 느낌은 인간 본연의 순수성과 온전함에 대한 갈구와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서는 폭력조차 허용되는 잔인한 사회의 모습을 대치시켜 보여주면서
개개인에게 각인되는 고통과 심리적 트라우마를 탁월하게 묘사해낸 소설로 보여집니다.
저는 이 내용에 대해 수행적 측면에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른 법을 배운 수행자 역시 이러한 사회의 모순을 보면서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사회의 모순을 보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2개의 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첫째는 사회운동가나 정치인들로서 사회의 모순에 부딪히게 될 때
사회의 구조적 문제나 사회환경의 문제를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반면 수행자나 철학자는 내 안의 자기모순을 바라보고 그것을 일깨우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이는 자기안의 모순과 인간의 본질을 깨우치고 그것을 가르치면 사회 전반의 변화가 올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올바름을 깨우쳤다 하더라도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강요한다면 그것이 다시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깨우쳤듯이 남들에게도 알려주면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배우고 익힐 수 있다고 확신할 뿐입니다.
수행을 통해 자기성찰을 한다고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경험을 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단지 계속 멍한 상태만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현실의 경험이 있고 그로 부터 자신의 감정과 견해들이 생겨날 때 자신의 마음을 직시하고 살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렇게 바라보게 되면 현실문제들와의 경험으로 부터 자신의 자기합리화나 감각적 욕망의 문제들이 드러납니다.
수행자의 삶을 살아갈 때 드러나게 되는 자신의 자기합리화나 감각적 욕망의 문제는
불교 수행법에서 오계(5가지 장애)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오계란
➀감각적 욕망(kāmāchanda), ➁적의(vyāpāda), ➂해태와 혼침(thīna-middha), ④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⑤회의적 의심(vicikichā) 을 말합니다.
즉 수행을 하지 않았을 때는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사회와 타인에 대한 비난과 혐오로 인해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던 자신의 감정들에 대해 어떠한 의도들이 깔려있는지를 스스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의 바라봄은 편견이 없이 느낌 그대로를 바라보는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치우친 감정이 아닌, 한걸음 뒤에서 객관적으로 살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때 자신의 견해에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현실과 각자의 입장을 있는그대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있는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감정을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좋으면 왜 좋고, 싫으면 왜 싫다는 것을 알아서 각자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살핌이 있는 사람은 사회가 혹은 상대가 나에게 싫은 것을 강요한다면
나는 그것이 왜 싫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어리석은 생각이 나에게 싫은 것을 강요한다면
나는 그것이 왜 싫은지를 나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타인에게 나의 견해를 설명하고 어떤 행동을 촉구한다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각자는 과거의 경험과 다양한 이해관계로 인해 전혀 다른 관점에서 사물과 일을 바라볼 수 있고
서로를 납득시키기위해서는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그 입장에 맞춰 설명해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설명하지 못하면서 행동을 요구하면 강요가 되는 것이고, 강요는 서로에게 감정적 앙금과 상처를 남깁니다.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채식은 탐욕과 폭력에 대한 순수정신의 저항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순수정신이라는 것이 곧 주변의 현실 조건을 살피는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라면
이 역시 새로운 형태의 관념적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는 이를 상견이라고 합니다.
나 자신의 영혼의 절대성, 완벽성을 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러한 것은 실체하지 않으며 단지 조건지어 생겨나고 조건지어 사라지기 때문에
이를 절대적 영혼(개아, 푸드갈라, 아트만)은 없다고 해서 '무아'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조건의 살핌을 통해 절대적 자아가 있다거나(상견)과 절대적 자아가 없다(단견)는 관념을 깨트리면
그것을 '중도연기의 지혜'라고 설하셨습니다.
'중도연기의 지혜'에 완벽한 나라는 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이든 타인이든 인간 본연의 절대적 순수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른 사유를 통해 바른 행동을 하면 올바른 나가 되는 것이고,
내가 그릇된 사유를 통해 그릇된 행동을 하면 그릇된 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 완벽한 나를 상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까요?
완벽한 나를 상정하게 되면 나의 불완전성이 드러났을 때 자신을 혐오하게 되고
타인의 불완전성이 드러났을 때 타인을 혐오하게 됩니다.
나 혹은 타인의 불완전성은 사유와 경험의 부족함 때문일 뿐이며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갖추게 되면 보다 나아지는 것일 뿐입니다.
부족한 것을 더 나은 사람으로 부터 배우고 익히면 개선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행위가 나올 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환경마다 시기마다 적절한 행위는 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나 혹은 절대적인 경지의 타인을 상정하지 말고
단지 자신과 주변에 대한 살핌과 대화를 통해
자신과 주변에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행위를 그때 그때 선택할 수 있는 지혜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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