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온

 

 

 

 

<윤회는 존재하는가?>

 

살아있는 소를 도살했을 때 뼈와 고기는 남아있지만 소의 그 생명은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 이세상이든 저세상이든 다른 어디론가로 날아갔을 것입니다. 생명력 자체가 완전히 흩어져서 다시 복원되지 않도록 분해되었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과거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지금은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무상(無常)하다고 하고, 도반이나 가까운 그 누군가가 지나간 것에 대해 지금도 있는 것처럼 상정하고 관념에 빠지면 그런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경책하고 일깨워줍니다.

 

눈앞에 보이고 들리는 것 일체(一切)도 그 일체가 드러나게 한 원인이 있습니다. 대상을 인식하고 해석하게 하는 나의 정신작용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일체가 드러난 이후에 그것을 다시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것이고 알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무기(無記: 의미없는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음)합니다.

이미 그러한 정신 작용이 끝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무아(無我)의 의미이고, 누군가 내가 있다고 착각하고 빠져들면 과거의 나라는 정식작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깨워줍니다.

순간순간 다른 나인 것이지요.

다만 일체를 드러나게 하는 정신작용이 분명 존재하기에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과거의 기억과 그로 인한 사실들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과거에 대한 기억과 관념이 지금 여기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리게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참본성의 작용>

 

즉 중요한 것은 지금여기에 대한 지속적인 알아차림입니다. 사실은 대상을 인지한다는 것 자체가 곧 알아차림 그 자체이지만 그 알아차림이 생각과 관념으로 굳어지면 그 즉시 다시 지금 여기 알아차림을 놓쳐버리는 현상이 누구에게나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알아차림은 즉 이미 생겨난 나의 생각과 관념에서 즉각적으로 빠져나오는 방법에 대한 훈련입니다. 모를 때는 훈련이지만 알고나면 이것이 곧 우리의 본성 그 자체인 것입니다.

 

 

아래는 조주스님의 선어록입니다.

지나간 것에 부딪히는 수행자들에게 지금 여기를 놓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책하고 있지요.

 

조주가 그의 나이 80세부터 120세에 입적할 때까지 줄곧 머물렀던 관음원(觀音院)에 있었을 무렵, 수행자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와 절을 올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불법(佛法)의 큰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에 조주 선사는 대답 없이 되물었다.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

수행자가 대답했다.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자 다시 조주 선사가 말했다.

"그러면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喫茶去]."

곁에 있던 또 다른 수행자가 물었다.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큰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는 그에게도 똑같이 물었다.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

그러자 또 다른 수행자가 답했다.

"예, 한 번 있습니다."

이에 조주는 다시금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喫茶去]."

옆에서 듣고 있던 원주(院主) 스님이 물었다.

"스님! 어째서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사람이나, 한 번이라도 온 적이 있는 사람이나 모두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라고 말씀하십니까?"

조주 선사는 원주를 조용히 바라보며 말했다.

"원주, 자네도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喫茶去]."

 

우리의 인식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찰나찰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 온전한 인식의 흐름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관념은 이미 지나간 생각에 머물러 새로운 흐름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곧 자신의 참본성을 잃는 행위입니다. 알아차림이란 이러한 참본성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작업입니다.

 

 

 

+ Recent posts